어머니는 카메라 셔터가 눌리는 순간이면 늘 눈을 감는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평생 그래왔고, 그래서 우리 가족 사이에서는 “엄마는 남이 시키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농담이 생겼다. 어머니는 미인이시다. 한국 여성의 평균 키가 155cm 이던 시절에 어머니는 170cm 의 늘씬하고 운동신경 좋은 사람이었다. 천성이 수집어 남의 눈에 띄는 것을 싫어했지만, 그 키와 그 미모로는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었다.
어머니는 5백 년째 같은 땅에 뿌리내린 가문에서 났고, 대대로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의 항렬을 지어주는 족보가 있었다. 어머니가 자란 곳은 친족마을이라서, 학교선생님이 고모였고, 의사는 친척 아저씨였으며, 같이 어울려 놀던 아이들은 사촌, 모두 민씨 성들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열두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셨고, 젊은 미망인이 된 외할머니와 일곱 자식은 친척들에게 기대어 살게 되었다. 외할아버지가 가장 예뻐하시던 어머니는 슬픔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했다. 그때 어머니는 가난의 쓰라림을 배웠다. 특히나 일가친척 사이에서 가난한 자가 된다는 것의 아픔 또한 익혔다. 피붙이의 호의에는 늘 양날이 있다는 것, 그것은 일정한 몸가짐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 어머니는 사촌들이 가지고 있는 고운 것들이 부러웠지만, 자존심이 강했다. 형제자매들도 서로를 굳게 단합했고, 손위 오빠들은 일했고, 동생들이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 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자선을 받던 그들이 베푸는 쪽이 되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 중 에서 홀로 대학진학을 위해 공부했고, 서울의 숙명여자대학교에 합격했다. 이는 시골 김포 출신의 아버지 없는 소녀가 이루어낸 온 마을의 쾌거였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난 것도 이 대학 시절, 단체 미팅 자리에서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배정된 짝이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그분의 눈에 들었다. 어머니의 본래 짝이었던 남자도 어머니에게 반해 있어, 다시 만나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본래 짝이었던 그 친구의 하숙방을 찾아갔다고 한다. 아버지가 즐겨 들려주시는 말에 따르면, 밤이 새도록 같이 술마시고, 흥정하고, 설득했다 한다. 밤을 꼽박 새고 먼동이 터올 즈음에야 그 친구가 마침내 손을 들고 어머니를 양보했다. 두 친구는 서울대학교 동급생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끝내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늘 흡족해 하셨다. 어머니는 곧 알게 되었다. 아버지도 본인처럼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고, 장남이기에 미래의 아내가 시어머니를 평생 모셔야 한다는 것을. 어머니는 그것을 이해했고, 정확히 그렇게 하셨다.

My mother and father, 1968, Seoul.
1969년 시월 어머니는 YWCA에서 아버지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사진 위쪽에 YWCA 간판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 었다. 왜 두 분이 체육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는지 나는 늘 의아했는데, 1960년대 명동의 YWCA는 사람들이 농구를 하러 가는 곳, 그 이상이었다. 그때부터 과거 십여 년 전 한국전쟁이 서울을 폐허로 만들었고, 그 폐허 속의 YWCA 3층 건물은 근대의 등대처럼 우뚝 서 있었다. 특히 여성 운동의 선구적 등불이었다. 당시 사회상황은 야심 있는 여자 대학생들의 진로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아내에게 혼인상의 권리가 전혀 없던 시절이었다. 이 시대에 축첩 제도 폐지나 남녀평등 같은 첨예한 화두를 논의하고 시위를 조직하는 곳이 바로 그곳 YWCA였다.
1976년, 미국으로 향하는 한국인 이민의 큰 물결이 이미 본격화된 시점, 부모님은 시어머니와 어린 두 자식을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 펜실베이니아 Audubon에 정착했다. 중산층 동네, 수영장이 딸린 판박이 식민지 양식 주택. 두 분이 희망을 좆아 찾아온 아메리칸드림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회사가 필라델피아 부촌인 메인라인(Main Line)으로 이사하고, 나와 동생을 명문 사립학교에 입학시켜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어머니는 단번에 거절하셨다. 어머니가 무엇보다 싫어하시는 것은 점잔 빼는 부자들이었다.
올해로 어머니는 여든이 되셨다. 두 딸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지만, 우리 자매 사이에 잃은 아들을 끝내 가슴에서 보내지 못하셨다. 힘든 임신 끝에 늦은 시기 잃은 아이였고, 그 후로 거의 일 년 가까이 편찮으셨다. 지금은 손자 넷을 둔 할머니가 되셨고, 손자들은 할머니를 끔찍이 따른다. 어머니는 골프를 좋아하시고 아프다가도 골프장에만 나가면 펄펄 나르신다. 지난 몇 해 사이 부쩍 약해지셨다. 올해는 갑작스레 찾아온 병환으로 비행기 타기가 두려워져, 식구들이 엘에이(LA)애 준비한 자기의 팔순잔치에도 참석하지 못하셨다. 반세기도 더 지난 어느 오후, 브루클린의 등나무 바구니 안에서 어머니를 발견하던 그 순간, 나는 이런 일들을 전혀 떠올리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때 식중독에 걸린 아들과 그 약혼녀를 돌보러 윌리엄스버그에 (Williamsburg, Brooklyn) 가 있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두 아이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나도 맨해튼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날이 좋았고, 배가 몹시 고팠다. 한번 가보려고 마음에 두고 있던 그 유명한 피자집 라앵뒤스트리(L’Industrie)에서 요기를 하느라 잠시 길을 돌았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길에 아담한 골동품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흔히 보는 그런 가게였다. 놋쇠 램프들, 낡은 의자와 탁자들이 즐비했고, 우리 할머니가 만약 백인이었다면 가지셨을 법한 무늬의 찻잔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오랜만에 갖는 혼자만의 시간을 음미했다. 계산대 가까이, 낮은 선반 위에, 낡은 흑백 사진들이 가득 든 등나무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이런 가게에 들를 때마다 늘 그냥 지나치곤 했던 종류의 바구니였다. 남의 가족 사진을 굳이 사 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의아해하면서.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 안에 손을 뻗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A basket of photos I found in a Brooklyn antique shop, May 2026.
사진 더미를 절반쯤 넘기다가, 어딘가 낯익은 큼지막한 흑백 결혼사진 한 장과 마주쳤다. 사진 위쪽의 YWCA 간판으로 보아 나의 부모님이 결혼식을 올린 그 같은 예식장에서 찍은 것이 분명했다. 재미있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머리 모양, 양복 깃, 신부 들러리들의 정성스러운 배열로 보아 비슷한 시기였다. 별 뜻 없이 하객들의 얼굴을 훑었다. 그러다가 어깨 부근에서 바깥쪽으로 멋스럽게 말려 올라간 단발머리에, 두 눈을 감고 있는 한 젊은 여자가 눈에 띄었다.
어머니였다.
사진 속 어머니의 옷차림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머리, 어깨 부근에서 바깥으로 멋스럽게 말려 올라간 그 컬은 다른 누구의 것일 수 없었고, 감긴 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빠르게 다른 얼굴들을 모두 훑어보았지만 알아볼 만한 사람은 없었다. 다시 어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진 값은 99센트, 세금까지 더해 1달러 6센트였다. 점원에게 2달러를 건네고 잔돈은 가지라고 했다.

The wedding photograph discovered in Brooklyn, 2026.
그날 밤 사진을 가족에게 보냈다. 어머니는 무심하게 그래 본인이 맞다 답하셨다. 그런데 그 결혼식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 상황의 기이함이 아직 어머니에게는 와닿지 않은 듯했다. 하루가 지나자 호기심이 생기셨는지, 그 시절을 함께한 가장 친한 친구분에게 전화를 거셨다. 친구분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진 속 어머니 옆에 함께 서 있었지만 얼굴이 일부 가려져 있었다고 했다. 두 분은 석유공사에서 함께 일했고, 신부는 외국인 비서실에서 일하던 미스 변,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이었다. 신랑은 아버지처럼 서울대학 출신이었고, 그 역시 인기 있는 신랑감이었다. 두 사람의 연애는 “열렬했다”고 친구분은 말씀하셨다.
며칠째 이 사진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들여다본다. 누군가가 이것을 버렸다. 돌아가신 부모의 옷장을 정리하던 자식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손주였을지도. 시간이 빠듯한 사촌이었을지도. 사진은 여러 손들을 거쳐 결국 브루클린의 등나무 바구니에까지 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내가 있었던 것은, 우연히도 전날 밤 아들이 무엇인가를 잘못 먹었기 때문이다. 라앵뒤스트리 피자집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피자를 핑계로 길을 돌지 않고 늘 다니던 길로 갔더라면. 그 바구니가 하루 전에 가게 안쪽으로 옮겨졌더라면.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수히 많고, 어머니는 그 모든 가정을 뛰어넘어 살아남으셨다.
그 사진 속 신부를 생각한다. 어쩌면 내 아들의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살면서, 이제 더는 둘 자리가 없어진 묵은 물건들을 기증했을지도 모를 그 신부의 손녀를 생각한다. 언젠가 내 아이들이 가려내게 될 내 사진들도 생각한다. 이십대에 서울 YWCA에서 번듯한 부류의 남자와 결혼했고, 지금은 칠십대 후반과 팔십대를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 세대의 여자들을 생각한다. 사진 속 신부는 몇 해 전 세상을 떠났다고, 어머니의 친구분에게서 전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사진을 부엌의 볕이 잘 드는 한쪽 자리에 두었다. 그 안에 어머니가 계신다, 눈을 감으신 채로. 결혼식 하객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다. 어머니는 명동 YWCA에 계시고,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으신다. 자기 역시 머지않아 백마 탄 왕자님과 결혼할 것이고, 그 신랑의 친구들이 어찌나 많은지 사진을 찍을 때 신부 측까지 빙 돌아 줄을 서야 했으니까.
어머니는 모르신다. 반세기도 더 지나, 당신의 딸이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도시의 한쪽 구역, 허름한 바구니 속에서, 99센트에 어머니를 찾아내게 되리라는 것을.
그 시절의 어머니라면 지금의 브루클린을 좋아하셨을 것 같다. 잘난 척하지 않는 수수한 동네, 실력있는 여자가 더 이상 비서로만 머물 필요가 없는 곳. 피자를 좋아하셨을 것이고, 둘레에 펼쳐진 세상을 보며 빙긋 웃으셨을 것이다. 당신의 미래의 손주며느리가 식중독에서 회복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십억 달러 규모의 AI 사업부를 이끌고 수많은 젊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보고를 올리는, 그런 세상을.

My parents’ wedding, Seoul, 1969.





